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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가 남자현 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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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여자 안중근', '독립군의 어머니'로 불리며 여성으로서는 실행하기 힘든 무장투쟁을 통해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한 평생을 바쳤던 독립운동가다.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암살'에서 여주인공 저격수 안옥수(전지현 분)의 실제 인물인 여성 독립운동가가 바로 '남자현' 지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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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가 남자현 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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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8월 27일 자 조선중앙일보 보도. ‘무토 노부요시 대장 암살범 남자현 별세, 단식으로 극도로 쇠약한 결과’. 남자현은 33년 2월 주만주 일본대사 무토를 처단하기 위해 나섰다가 하얼빈 중심가에서 일경에 체포되고 만다. 그리고 그는 하얼빈 감옥에서 죽음으로 항거하기 위해 단식에 들어갔고 단식 9일 만에 혼수상태에 빠져 병보석으로 출소한 후 사망한다.
조선중앙일보 그해 10월 18일 자 사진기사 형식의 보도. ‘고 남자현묘 입석식이 10월 12일 오후 4시 하얼빈 외국인 공동묘지에서 있었다’는 내용이다. 석관묘와 2m 못 미치는 묘비 사진이 실렸다. 묘비 맨 위에 선명한 십자가. 그는 죽어 독립을 지켜봤을 것이다.
1910년 무렵 영양 석보면 포산동에 포산동교회가 설립되는데 이는 석주 이상룡(독립운동가)의 동생 이상동과 그의 아들 백광 이운형(독립운동가·1892~1972)이 세운 교회였다. 이들은 1909년 포산동으로 이주해 예배당을 설립하고 농업개발 및 성서연구에 매진한다. 1919년 예배당이 신축된다.… 남자현과 지역적 연고가 깊고 이운형과 연계 가능성이 크다.… 이운형이 만주와 국내 3·1운동 연계를 위해 국내에 들어와 다시 만주로 갔을 때가 남자현의 영양 탈출과 같으므로 결국 남자현의 만주행에는 그 중심에 기독교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강윤정 연구 논문)
그 포산동교회를 찾는 데 애먹었다. 마을도 교회도 기억하는 이들이 없었다. 생가지 인근을 헤매며 노인들을 만나 물은 끝에 포도산(748m) 정상 인근 분지 형태의 마을에 이르렀다. 생가지에서 13㎞ 떨어진 곳으로 요즘과 같은 시대에 이처럼 오지가 있나 싶을 정도였다. 마치 영화 ‘동막골’을 보는 듯했다. 화전마을로 형성된 포산동은 백두대간 트레킹을 하는 이들이나 찾는다. 8가구가 산다. 물론 1인 가구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눈에 띄는 팻말이 있었다. ‘머루(포산)산 성지’. 천주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이곳에 숨어들어 신앙공동체를 이뤘고 1814년 배교자의 밀고로 파괴돼 순교자를 낳은 곳이다. 일경에 쫓겨야 했던 이상룡 선생, 또 이상동 이운형 부자도 천하의 요새 같은 이곳에 교회를 세웠다. 한때 70여명이 출석했다.
“제가 초등학교 때까지(1970년대) 포산동교회에 출석했어요. 크리스마스와 부활절 때 사탕과 달걀을 받는 재미로 다녔어요. 지금이야 차가 들어오지만, 그때는 산길만 있었죠. 80년대 폐쇄됐을 겁니다.”
타지에 살며 텃밭을 가꾸기 위해 들어왔다는 이곳 출신 중년 농부가 옛 예배당 터를 알려주며 증언했다. 핍박받던 의병 가족 남자현 일가는 이 깊은 산속에서 안동의 기독교 지도자들과 함께하며 기도하고 교육을 받았다.
또 한 사람의 연구자 이윤옥(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 선생은 2014년 동만주 열두 교회 개척자 남자현이 감옥에서 곡기를 끊고 별세한 후 그가 묻힌 하얼빈 옛 외국인 공동묘지 내 남자현묘지터를 찾아낸 인물이다. “독립은 먹고 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에 있다”는 남자현의 기도를 쫓아 거기까지 간 것이다. 비신앙인인 그가 세상의 기독교인들에게 말했다.
“왜 한국교회는 갇히고 매 맞아 가며 동포의 정신을 일깨우고 열두 교회를 세워 해방을 염원했던 남자현 같은 신앙인을 알려고 하지 않나요. 왜 ‘유관순’ 한 분만 있다고 생각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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