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운동에 목숨 바친 선교사들의 헌신 [특집②]

홍정원 / 기사승인 : 2019-10-25 16:5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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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묻힌 조국보다 한국 더 사랑한 '파란 눈'


▲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사진=박민규 기자


 


▲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사진=박민규 기자

 


고국보다 한국을 더 섬긴 이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외국인이 있다.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이하 양화진 묘원 혹은 묘원)에 안장돼 있는 선교사들이 그들이다. 양화진 묘원에는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걸쳐 우리 민족을 위해 일생을 바친 외국인 선교사와 그들의 가족 140여 명이 묻혀있다. 선교사들은 기독교가 들어오지 않았던 '척박한' 이 땅에 그리스도 복음의 빛을 나누기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았다. 


 


병든 사람들을 위해 병원을, 무지한 이들을 위해선 학교를 설립해 사회 발전에 기여했음은 물론, 조선인이 아님에도 일제에 맞서 독립운동을 한 선교사도 많았다. 이들은 성서 번역으로 한글 발전에도 공헌했다. 이와 관련, 한국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 이만열 위원장은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했지만 구한말까지도 완전한 평민 글자는 아니었다"며 "외국인 선교사들이 성서를 번역하면서 한글이 서민 글자로 자리잡게 됐다"고 설명했다.


 



▲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사진=박민규 기자
또 양화진 묘원을 둘러본 한 방문객은 "일제강점기 때 친일파도 있었는데…. 외국인 선교사들은 우리나라를 위해 가족까지 희생시키고 훌륭한 일을 하신 분들이다"며 "목숨까지 걸고 독립운동을 한 분들도 있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뭉클하다"고 관람 소감을 밝혔다.

 


묘원에 묻힌 선교사들의 헌신과 업적은 선교 200주년을 향하는 한국 기독교에 있어 소중한 자산으로, 방문객에게 깊은 감동과 깨달음을 준다. 외국인 선교사들은 의료·교육·독립운동·성경번역·고아사업 선교 등으로 복음을 전파했다.


 


■ 의료 선교


헤론과 언더우드, 에비슨, 홀 가족 등은 의료 선교에 힘썼다. 양화진에 최초로 묻힌 외국인 선교사 헤론, J.W.은 지난 1885년 북장로회 의료선교사로 조선에 들어왔다. 입국 후 알렌, 언더우드와 함께 제중원(현 세브란스병원의 시초)에서 의사로 일했다. 열악한 환경에 굴하지 않고 아픈 조선인들을 치료하던 헤론은 자신도 이질에 걸려 한국에 온 지 5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의료·교육선교사 언더우드, H.G.는 한국 선교의 개척자로, 3대가 조선기독교대학(훗날 세브란스 의대와 합쳐져 연세대가 됨)에서 헌신했다. 1885년 조선 땅을 밟아 우리나라 첫 장로교회인 새문안교회와 경신학교, 연세대학을 설립했으며 평생 성서번역위원장으로 일했다. 그의 희생은 한국 교회역사와 사회개혁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양화진 묘원에는 그와 아내를 비롯해 4대에 걸쳐 7명이 묻혀있다.


 


▲ 언더우드, H.G. 사진=키아츠 프레스, 구글

에비슨, O.R.은 우리나라 근대 의학의 발전에 크게 공헌하고 세브란스병원 설립과 교육으로 한국을 섬겼다. 1893년 한국에 온 에비슨은 제중원에서 4대 원장으로 환자들을 돌봤다. 이후 세브란스병원과 의학교를 세우는 등 43년간 한국에서 일하다 1935년 은퇴했다. 그의 아들 내외가 양화진에 안식하고 있다. 


 


홀 가족은 로제타 홀을 중심으로 한국 의료 선교를 위해 2대가 헌신했다. 로제타는 남편 윌리엄과 딸을 잃는 고통 속에서도 45년간 한국인들을 위해 희생했다. 아들 셔우드 홀은 해주에 최초의 폐결핵 요양원을 세워 환자들을 치료했다. 크리스마스 씰을 발행해 결핵에 대한 계몽운동도 벌였다. 묘원에는 3대에 걸쳐 6명(선교사는 4명)의 홀 가족이 합장돼 있다.


 


■ 교육 선교


아펜젤러, H.G는 집안 대대로 교육 선교를 했다. 한국 근대 교육은 물론, 감리교 최초 선교사로서 한국 감리교의 초석을 놓았다. 1885년 내한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교육기관인 배재학당과 첫 감리교회인 정동교회를 개척했다. 한글 번역에도 애쓴 그는 1902년 성경번역위원회 참석차 목포로 가던 중 배가 침몰해 순교했다. 그는 배재학당 안에 협성회라는 토론회를 조직하고 독립협회의 서재필, 윤치호를 강사로 초청해 학생들에게 민주주의 의식과 독립정신을 고취시켰다. 양화진에는 아들 부부와 딸이 잠들어 있으며 배재학당에서 세운 아펜젤러 기념비가 있다.


 


벙커, D.A.는 육영공원 교사로 1886년 한국에 들어왔다. 아펜젤러가 소천한 후 배재학당의 3대 교장으로 재직하는 등 한국에서 40년 동안 헌신했다. 벙커가 아꼈던 배재학당 제자 이승만 등이 투옥되자 석방운동을 펼쳤고 이들은 옥중에서 복음을 받아들였다. 벙커의 아내 애니 앨러스도 선교사였으며 양화진에 함께 안장됐다.


 


▲ 헐버트, H.B. 사진=위키백과, 구글
베어드, W.M는 숭실대학을 설립한 교육 선교사다. 1891년 한국에 온 베어드 부부는 초반 몇 년 동안에는 부산과 대구를 중심으로 교회를 개척했다. 1897년 선교지를 평양으로 옮긴 후 숭실학당을 열었다. 이 학당은 숭실중학으로 성장했고 1905년 숭실대학으로 발전했다. 양화진 묘원에는 베어드 부부 기념비와 두 아들의 무덤이 있다. 

 


■ 항일 선교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외국인'으로 유명한 헐버트, H.B.는 조선에 관한 글을 다양한 주제로 써 해외에 알렸으며 한국 독립을 위해 싸웠다. 광복 후 이승만 대통령 초청으로 86세 노구를 이끌고 내한했으나 여독으로 쓰러져 숨을 거뒀다. "웨스터민스터 사원(영국 왕실 사원)보다 한국에 묻히고 싶다"는 그의 유언에 따라 유해는 한 살 때 죽은 아들이 있는 양화진에 안장됐다.


 


터너, A.B.는 성공회 2대 주교로, 성공회의 부흥과 YMCA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인천과 강화도에 집중돼 있던 성공회 선교 영역을 수원과 충북 진천까지 확대했다. 또 1907년에서 1910년에 이르는 한일합방 시기에 YMCA 회장을 맡으며 이상재, 윤치호 등의 항일운동을 도왔다.


 



▲ 베델,E.T. 사진=국가보훈처 홈페이지
영국 언론인 베델, E.T.는 그가 창간한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데일리뉴스를 통해 한국을 식민지로 삼으려는 일본 제국주의 정책을 비판했다. 베델은 양기택, 신채호, 박은식 등 민족지사들을 신문사 주간으로 영입해 일제 만행을 고발하고 애국심을 고양하는 글을 실었다. 심신이 약해진 그는 1909년 37세의 젊은 나이로 소천해 양화진 묘원에 묻혔다.



■ 성서 번역 선교


한국문화를 잘 이해하고 사랑한 선교사 게일, J.S.는 당시 문화를 서양에 알리고자 애쓴 '한국학 선구자'다. 또 한국적인 기독교를 지향한 그는 레이놀즈와 함께 성경번역위원회 상임위원으로 성서 한글 번역에 기여했다. 캐나다 평신도 선교사로 한국에 온 게일은 1900년 연못골교회(현 연동교회) 초대 담임목사로 교회의 기반을 다졌으며 경신학교와 정신여학교 설립의 토대를 닦았다.


 


레이놀즈, W.D.는 미국 남장로회 개척선교사로, 성서의 한글 번역에 크게 공헌했다. 1895년 성경번역위원으로 선임된 후 43년간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일에 매진했다. 특히 1910년 출판된 구약 성서 번역의 주역이었다. 성경 번역은 외국인 선교사와 한국어 선생의 공동작업이라 할 만큼 한국어 선생의 역할도 지대했는데 레이놀즈가 번역에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박학다식한 한국어 선생 김필수의 공도 컸다. 이곳 양화진 묘원에는 한국에서 한 살도 되기 전 죽은 맏아들과 아버지 레이놀즈에 이어 선교사로 헌신한 둘째 아들이 합장됐다.


 


■ 계급사회 조선의 여성·고아·백정 '소외된 이웃' 선교


위더슨, M.은 한국 고아를 위해 일생을 바친 구세군 선교사다. 1926년 한국에 들어와 7년 동안 서울 변두리 고아원에서 줄곧 고아들과 함께 생활했다. 1953년 부산에 도착해 한국 구세군 사령부를 조직하고 고아들을 돌보는 일을 계속하다 위암에 걸려 1956년 소천했다.


 


소다 가이치는 양화진 묘원에 안장돼 있는 유일한 일본인으로, 아내와 함께 한국 고아들을 위해 삶을 바쳤다. 1921년부터 해방될 때까지 1000명 이상의 고아들을 돌봤으며 일제 패망 후에는 일본에서 복음을 전했다. 1961년 한경직 목사 초청으로 한국으로 돌아와 영락보린원에서 고아들과 생활하다 세상을 떠났다.


 


▲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사진=박민규 기자

 


스크랜턴, M.F.는 한국 근대 여성교육·전도의 선구자다. 53세 되던 1885년 외아들 내외와 조선에 첫발을 내딛고 이화학당을 열어 많은 여성들을 가르쳤고 전도부인회를 조직해 복음을 전했다. 24년 동안 조선 여성들을 위해 일하다 77세에 순교했다. 캠벨, J.P.도 여성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펼쳤다. 중국에서 10년간 선교사역을 했으며 44세 때 내한해 여성 교육·선교를 위해 배화학당을 세웠다. 한국 여성들을 복음 안에서 새롭게 변화시키는 일에 매진하던 중 68세에 소천했다. 


 


무어, S.F.는 백정 등 특히 가난하고 억눌린 백성을 위한 전도했다. '백정 전도의 개척자'이자 '백정 해방운동 조력자'로 불린 선교사다. 장티푸스에 걸려 죽어가던 백정 박정춘을 에비슨 선교사와 함께 치료해 준 일이 계기가 돼 박정춘과 함께 차별 받던 많은 백정들에게 복음을 전파했다. 1906년 장티푸스에 걸려 46세 일기로 제중원에서 숨을 거뒀다.


 


 


글=홍정원 기자 사진=박민규 기자 자료도움=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재단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특집①] 복음 위해 삶 바친 이들의 숭고함' 기사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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