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집 커진 한국 여자골프, 이젠 내실을 다질 때

권국만 대기자 권국만 대기자 / 기사승인 : 2020-01-08 08: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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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년 메이저골프대회가 열리는 아일랜드CC. 아일랜드CC 제공

 

지난해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에서 상금랭킹 20위 이내에 올랐던 선수 가운데 단 한명도 미국이나 일본 무대로 옮겨가지 않고 전원 KLPGA 투어에서 새 시즌을 맞는다.

단 한명의 정상급 선수 유출 없이 새 시즌을 맞은 것은 KLPGA 투어에서는 거의 처음이다.

작년 시즌은 전년 상금랭킹 1위와 2위 선수가 모두 미국, 일본으로 무대를 옮긴 채 시작했다. 2년 전, 3년 전에도 그랬다.

박세리가 미국 무대를 개척한 이후 KLPGA투어 정상급 선수가 미국, 일본으로 무대를 옮기는 것은 해마다 이어진 연례행사나 다름없었다. 2005년부터 2018년까지 배출된 상금왕은 예외 없이 미국이나 일본으로 떠났다.

2010년부터 상금왕에 올랐던 이보미(32), 김하늘(32), 장하나(28), 김효주(25), 전인지(26), 박성현(27), 이정은(24)은 짧게는 한번, 많아야 두 번 상금왕을 차지한 뒤 해외로 진출했다.

상금왕이 아니라도 김세영(27), 이미림(30), 이민영(28), 이정은(32), 배선우(26), 고진영(25) 등 한국에서 뛰어난 성적을 낸 선수들도 줄줄이 미국이나 일본으로 무대를 옮겼다.

그런데 작년에 이런 관행에 제동이 걸린 것이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역시 KLPGA투어의 눈부신 성장이다.

작년에 KLPGA투어는 30개 대회에 253억원의 상금을 내걸었다. 올해는 대회가 1개 더 늘었고, 상금도 269억원으로 불었다.

KLPGA투어의 상금 규모는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에는 아직 크게 모자란다. LPGA투어 올해 상금은 880억원가량이다. KLPGA 투어의 2배가 넘는다.

미국의 높은 세율과 각종 경비, 이동 거리에 따른 피로도, 그리고 LPGA투어 대회는 대부분 4라운드라는 사실 등을 따지면 차이가 크다고 보기 어렵다.

일본여자프로골프(JLPGA) 투어는 이제 대등한 수준이다. 올해 JLPGA투어 상금은 430억원이다. 일본의 물가를 고려하면 한국과 격차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돈을 벌려고 미국이나 일본에 진출하는 시대가 끝났다는 얘기다.

그렇지만 KLPGA투어에서 미국, 일본으로 가려는 선수는 아직도 많다.

'당장은 아니다'라면서도 "언젠가 가고 싶다"는 선수가 즐비하다.

미국이나 일본에서 뛰는 선수들은 KLPGA투어의 후배들에게 "어서 오라"고 권한다. "와보니 너무 좋다"고 만족감을 숨기지 않는다.

작년에는 한명도 없었지만, 올해 연말이면 또 정상급 선수의 해외 진출 뉴스가 들려와도 놀랄 일이 아니다.

이는 KLPGA투어가 LPGA투어나 JLPGA투어보다 아직은 뒤처진 게 많다는 뜻이다.

오랜 세월 동안 다져온 내공은 따라잡기에는 아직 부족한 게 사실이다.

잘 갖춰진 연습 시설이나 이동식 탁아소와 체육관, 의료시설 등 경기장 편의 시설과 운영도 미국, 일본이 훨씬 낫다.

몸집은 얼추 비슷하게 커졌지만, 내실은 여전히 뒤졌다는 게 냉정한 평가다.

KLPGA투어가 지금까지 몸집을 불리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면, 이제는 내실을 다져야 한다는 과제를 안은 셈이다.

우선 경기장 시설의 상향 평준화가 시급하다.

20개 넘는 KLPGA투어 개최 코스는 수준이 아직은 천차만별이다. 그린 스피드와 경도, 레이아웃, 잔디 상태 등 난도를 결정하는 요소가 LPGA투어 대회 코스에 못지않은 곳도 많지만, 수준이 떨어지는 코스에서도 대회는 열리는 게 현실이다. 수준 이하 코스에서는 대회를 치르지 않는 게 바람직하다.

대회 코스에 반드시 연습장을 갖추도록 의무화도 서두르자.

메이저대회는 연습장을 갖춘 코스에서 열도록 의무화되어 있지만 일반 대회는 아직 아니다. 선수가 경기 전에 몸을 풀려고 1시간 거리의 골프 연습장을 들렀다 오는 일은 이제 없어져야 한다. 당장은 어려워도 투어가 의지를 보여야 변화가 생긴다.

미국이나 일본에 진출한 선수들이 맨 먼저 꼽는 게 경기장에 붙어 있는 연습장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경기위원 전임제도 더는 미뤄서는 안 될 과제다. 경기위원의 실력은 투어의 수준을 좌우한다. 프로야구, 프로축구, 프로농구 등 프로 종목 심판은 다 전임제다. KLPGA투어는 엄연한 주요 프로 종목이지만 심판 격인 경기위원은 전임이 3명뿐이다.

실력 있는 경기위원은 돈 없이는 어렵다. 경기위원 실력 향상에도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대회 운영비 예산도 상금만큼 늘려야 한다.

KLPGA투어 인기가 높아지면서 경기장에는 늘 구름 관중이 몰린다. 대회 때마다 관객 편의시설이 모자라거나 불편하다는 불만이 쏟아졌다.

현장에서는 상금은 많이 올랐지만, 대회 운영 경비는 제자리걸음이라고 하소연이다. 돈이 모자라니 사람도 시설도 부족하고, 피해는 관객에게 돌아갔다.

상금을 늘리면 대회 권위가 높아지지만, 대회 운영비를 증액하면 관객이 더 즐거워진다는 점을 명심하자.

또 하나 KLPGA투어가 내실을 다지려면 귀담아들어야 할 해외 진출 선수들의 목소리가 있다. 

 

▲ '비씨카드·한경 레이디스컵 2018' 우승자 최혜진(20.롯데)이 우승을 확정짓고 기자들에게 둘러쌓여있다. 아일랜드CC 제공


KLPGA투어가 눈부신 성장을 거듭한 최근 2년 동안 현장에서 만난 선수들에게 미국과 일본에는 있는데 한국에 없는 대표적인 게 무엇인지를 물어봤다.

수준 높은 경기장과 부속 시설 등 하드웨어를 꼽는 선수도 적지 않았지만, 선수들에 대한 '존중'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들은 한결같이 이름은 밝히지 말라는 전제를 달고 "한국에서는 선수로서 존중받는다는 느낌이 별로 없었다"면서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경기장 안팎에서 내가 중요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늘 받는다"고 밝혔다.

연습 시설이나 음식료 등 선수를 위한 편의 시설이 미국이나 일본이 아무래도 한국보다 체계적으로 잘 갖춰져 있는 건 분명하지만, 하드웨어가 다가 아니라는 얘기다.

잘 갖춰진 하드웨어에 담겨 있는 기본 원칙이 선수에게 대한 '존중'이라고 이들은 지적했다.

"선수가 경기에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와준다. 모든 일이 선수 위주로 돌아간다. 한국에서는 선수가 경기에 집중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신경 써야 할 일이 너무 많다"
선수들은 구체적인 사례를 드는 건 모두 꺼렸지만, 한국에서 뛸 때보다는 미국, 또는 일본에서 선수 생활이 훨씬 마음이 편한 건 분명하다고 밝혔다.

KLPGA투어가 더는 미국과 일본에 우수한 선수를 뺏기지 않으려면 왜 선수들이 이런 말을 하는지 알아봐야 할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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